(::힌츠페터씨 심장병 위독::)“우리는 당신의 고마움을 절대로 잊지 못합니다.”5·18의 실상을 지구촌에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67·사진)의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소원이 행정조례 때문에 이뤄지지 못하게 되자 광주시민들이 광주시청을 압박해 이를 관철시키도록 했다.
힌츠페터는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ARD-NDR) 도쿄 주재 카메라기자로 일하면서 ‘학살 광주’의 참상을 취재해 영상을 통해 세계에 처음 알린 인물. 이달초 심장병으로 쓰러져 독일 북부 도시 라체부르크의 한 병원에 입원한 그는 가족들에게 “한국의 민주화과정은 나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었다. 내가 죽으면 광주에 묻어달라”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5·18기념재단측은 그가 사망하면 옛 5·18묘역에 유해를 안장하기로 했으나 광주시가 ‘외국인의 경우 광주에서 사망할 때만 매장할 수 있다’는 시립묘지조례를 들어 난색을 표명했다.
이에 대해 광주시민들은 “명예시민증을 주어서라도 그의 소원을들어줘야 한다”는 내용의 글로 광주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을가득 채웠다. 수도권과 영남권 네티즌들도 이에 가세해 “광주와한국이 그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결국 광주시 관계자는 11일 “이한열·조성만씨 등 민주화운동관련자들이 묻힌 옛 5·18묘역(광주시립묘지 3묘역)에 그의 유해가 안장될 수 있도록 조례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우천기자 goodpe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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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신군부와 언론이었다. 언론이 그들의 정신만 잃지 않았다면 아마도 신군부는 막을수도 있었겠지. 진실만을 알렸다면 아마도 한국의 민주화는 더 빨라질수 있었고, 그 많은 피도 흘리지 않을수 있었겠지.
이 파란눈의 외국인 기자가 80년 그날 느낀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평생 따라다녔을까. 그 죽음의 순간 까지도… 아마도 80년 광주에서 그는 보편적 인류애를 느꼈을 것이다. 살아있는 자로써 자유를 위한 피어린 싸움과 좌절. 그리고 항쟁기간동안 가질수 있었던 해방감을 광주시민들과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순간 그는 그의 목숨을 내어놓고 광주시민이 되어 죽을 각오를 하고 광주를 취재했을것이다. 그의 무기는 펜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진정으로 한국의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들에게 묻고 싶다. 언론의 사명인 진실을 보도함에 있어서, 아직도 당시의 어쩔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 하며 자기의 안위를 보존하고 있지 않았는지…
광주항쟁으로 대한민국의 언론이 부디 다시한번 언론윤리와 사명의 중요성을 깨닳고, 국민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부디 한국언론이 을 외면하고 침묵하며, 펜으로 그들을 신군부의 총칼 함께 들을 살해한 가해자. 혹은 방관자. 동조자로써 큰 죄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라며…
드디어 정간법이 개정될것 같다. 여야당 모두 이번에는 제대로 언론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부디 언론인들 자신이 이제는 좀 각성했으면 좋겠다.